대한의 항일조직 간부의 최후 사살장면
고문의 도구(1940년)
움지이지 못하게 고정시켜 손톱을 뽑고 전기 충격을 주어 자백을 받아내는 형틀이다.
일주일 동안 물과 음식을 주지 않고 사지를 묶고 어둔 곳에서 자백을 쉽게 받아내기 위해 자행했던 특이한 고문형틀이다.
관동대지진 한국인 집단학살
일본은 대지진으로 인해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한국인 폭동설을
유포시켜 일본인 자경단으로 하여금 한국인을 처참하게 학살했다.
관동대지진 한국인 시신들...
시신이 부패되어 처참한 모습들이다.
부모의 처형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1939년)
부모를 잃고 두 형제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다.
원폭으로 폐허가 된 도시
철저하게 파괴된 나가사키 중심도시의 처참한 모습이다.
어느것도 생존가능성이 없는 죽음의 도시로 변한 것이다.
생활터전을 잃고 침묵하는 모습
일본항복 문서조인
패망으로 열차를 기다리는 일본인(1945년)
조국으로 돌아가는 한국인
일본 거류민 해방축하(1945)
일본땅에서 한국 태극기가 바람에 물결치고 있다.
교민 학생들이 애국지사 석방을 외치면서 동경시내로 모이고 있다.
당시의 태극기(1945년)
일본 패망과 광복의 그날...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로 인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과 함께
우리민족은 기나긴 굴욕 식민치하을 청산하고 민족 해방을 이끌어 냈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급히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서로를 껴안고 해방의 기쁨을 확인하고 감격을 노래했다.
8월 한여름 태양보다 이날의 감격과 흥분의 열기가 더 뜨거웠다
광복은 갑자기 찾아온 손님도 아니고 연합군이 건네준 2차대전 승리의 선물도 아니었다.
국내는 물론 이역만리에서 일제의 압제와 불의에 맞서 싸운 선열들의 빛나는 투쟁으로 우리 민족 스스로 쟁취해낸 것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원폭으로 아이는 머리카락까지 타버렸다.
아이에게 젖을 주고 있지만 방사능으로 고통 속에서 살 것이다.
2층 전시실의 내부 모습이다.
근대사 역사관 2관은 이것으로 끝맺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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